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문단 편집) == 포위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24px-OEF-map-6.jpg|width=650]] 소련군은 1943년 말부터 B분견군에 대해 전 전선에서 심각한 압박을 가해 오고 있었다. 42군단은 키예프 돌출부에서 일부 남하한 소련 전차들에게 공격당하기 시작했고, 우익에 있던 11군단 역시 12월 20일부터 대규모 교전에 휘말린 상태였다. 한편 제42군단 남쪽에 있던 제7군단은 압력을 해소하기 위해 서쪽을 향해 소련군 측면을 연신 두드렸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진 못했다. 44년 1월 7일에는 제5근위전차군의 공세가 제47기갑군단의 방어 구역인 키로보그라드에 떨어졌다. 히틀러는 키로보그라드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려 제10기갑척탄병사단, 제14기갑사단, 제3기갑사단, 제376보병사단이 포위될 위기에 처했으나 제3기갑사단장 프리츠 바이에를라인의 단독 결정으로 제3기갑사단은 포위망을 돌파해 구원을 위해 달려온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척탄병 사단과 제3SS 기갑사단 '토텐코프'와 합류했다. 이 반격으로 독일 제8군 전체를 위협하는 포위 작전은 저지당했지만 남부집단군 예하 기갑사단 중 8개 기갑사단의 전력이 소모당하는 타격을 받아 제42, 11군단이 포위되는 여건을 조성했다. 1월 18일, 2개 전선군의 협격 공세가 시작되었다. 독일 정보 기관이 알지 못했던 새로운 전차군인 제6전차군이 눈 속을 뚫고 튀어나오자 독일군은 혼비백산했다. 제6전차군은 제7군단과 제42군단의 전투 지경선을 파고드는 데 성공하여 두 군단을 쪼개 버리고 포위망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 공세로 제7군단은 남서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제6전차군 소속 제20근위전차여단이 28일에 즈베니호로드카 마을에서 제2우크라이나전선군 소속 병력들과 합세하는 데 성공했고 2월 3일에는 두 전차군이 완전히 조우하여 코르순-체르카시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포위망에 갇힌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 전투]] 때의 제6군 꼴이 될 것이라고 흡족해했다. 코네프는 스탈린에게 이렇게 장담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스탈린 동지. 갇힌 적들은 그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포위망 속에 갇힌 2개 군단은 55% 정도밖에 편제되지 않은 6개 사단과 완전 편제된 정예 [[SS]] 사단인 제5 SS 기갑사단 '비킹'과 [[벨기에]]인으로 구성된 SS 강습여단 '발로니엔', [[에스토니아]]인으로 구성된 SS 대대 '나르바' 등 6만 명의 병력이었다. 포위망에 갇힌 2개 군단은 '슈팀머만 집단'(Gruppe Stemmerman)으로 새롭게 편제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